「 아직도 범인이 잡히지 않은 일본의 미제사건인 3억엔 강탈사건 (三億円事件)




일명 삼억엔 강탈사건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은 도쿄도 후츄시에서 1968년 12월10일에 발생한 사건으로 1975년 12월 10일 공소시효가 성립되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다.


일본 범죄사에서 가장 유명한 해결하지못한 미제사건의 하나로 인식되는 사건으로 완전범죄라는 상징성 때문에 아직까지도 소설,드라마,영화,만화등 각종 미디어에서 이 사건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미제사건




※.사건기록(미제사건의 시작)


1968년 12월 6일 일본신탁은행(日本信託銀行) 코쿠분지 지점잠에게 다음날인 12월7일 5시까지 범인이 원하는 장소에 3백만엔을 가져오지 않으면 지점장의 집을 폭파하겠다는 한통의 협박편지가 전달된다.


이에 신고를 받은 경찰에서는 범인이 지정한 12월 7일에 약 50여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잠복, 감시 했지만 범인은 나타나지 않아 단순한 헤프닝쯤으로 여겼다.


그로부터 4일후인 1968년 12월10일 오전9시 30분경 고쿠분지 지점에서는 도쿄 시바우라 전기(현 도시바. 앞으로 도시바라고 칭함) 후츄 공장에 지급애야할 연말 보너스 약 3억엔(정확히 2억 9430만 7500엔)의 현금이 들어있는 트렁크 3개를 싣고 후츄 형무소 뒤쪽을 지나고 있었다.(현금 수송 차량이라고는 하지만 요즘과 같은 특수차량이 아닌 닛산에서 만들어진 세드릭이라는 일반 세단이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그랜저 정도.)

3억엔 도난 사건

거기에 경찰 오토바이 대원으로 위장한 범인이 수송차량을 따라와 수송차량 앞에 오토바이를 세워 차량운행을 막는다.


이에 현금수송차량 운전자가 무슨일이냐고 묻자 "고쿠분지 지점장의 집이 폭파됐다. 이 수송차량에도 다이너마이트가 설치되었다는 정보가 있으니 이 차량도 조사해야 한다"라고 하며 수송차량의 하부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미 4일전에 협박편지를 받은것을 인지하고 있던 은행직원들은 금새 긴박한 분위기에 휩쓸려 수송차량에서 내려버렸다.


그사이 범인은 마치 다이너마이트를 찾는것처럼 차량 하부를 들여다보며 미리준비해온 조명장치에 불을 붙이며(섬광탄비슷한것이 아닌가 싶다.) "폭발할거야. 빨리 도망쳐!"라고 외치며 피어오르는 연기에 겁을 먹고 있던 수송차량 기사와 탑승자를 대피시킨후 경찰 오토바이를 방치해둔채 수송차량을 끌고 사라진다.


이때 기사와 수송차량 탑승자들은 경찰이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멀리 수송차량을 대피시켰다며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기를 뿜어내고 있던 범인이 미리 준비한 조명장치가 모두 연소되자 한 은행직원이 남아있던 오토바이가 가짜임을 깨닫게 된다.

용의자 몽타주

범인이 타고온 오토바이는 진짜 경찰 오토바이가 아닌 경찰 오토바이로 꾸민 야마하 스포츠 350 R1 모델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은행원들이 은행과 경찰에 신고를 했으며 경시청은 도쿄 전역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수사를 시작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으며 이 범행당시가 범인이 처음으로 모습을 들어낸 날이라고 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1968년 12월10일은 연말 특별 경계의 날 이었다.



범인은 약 120개의 증거품을(오토바이 및 조명장치등) 남기고 도주하여 경시청에서는 금방 범인을 잡을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나 증거보존도 제대로 되지도 않았을뿐더러(범인이 썼을지도 모를 모자를 형사들이 돌려쓴다는둥) 남기고간  증거품 역시 도난품이나 대량으로 생산 유통되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어서 범인을 특정할만한 이렇다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범인에 관련된 목격담과 증언


사건발생 10분전인 9시20분에 무었인가를 노리고 있는것 같이 대기하고 있는 오토바이를 목겨했다고 한 주부가 증언

사건발생 30분전인 9시 경 코구분지 지점에서 약 50M 떨어진 곳에서 은행을 엿보고 있던 의심스로운 남자를 목격한 사람이 4명이 있었으며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약 165~170정도 키에 30대정도의 남자라고 한다.

스기나미구에 설치된 검문소에서 은색 트렁크를 싣고가는 회색 밴을 포착했으나 검문소를 그냥 돌파했다. 이것이 범인이 목격된 마지막이라고 한다.


이후 12월 21일에 사건직후 용의자로 떠오른 인물(한 비행청소년)이 비슷하다는 은행원 4명의 진술을 토대로 몽타주가 만들어졌으나 놀랍게도 이소년은 사건발생 1년전에 이미 고인이었다.


웃긴점은 이렇게 만들어진 몽타주가 1971년에 "범인은 몽타주와 비슷하지 않아도된다"라고 수사방침을 전환 했으며 1974년에 정식으로 파기되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 범행에 사용된 조명장치는 후에 연막탄이라고 밝혀졌다.


● 위에도 잠시 나오지만 범인이 사용했던것으로 추정되는 모자를 형사들이 돌려 쓰는바람에 범인을 단서할 증거품이 훼손되었으며 범인의 지문으로 추정되는 지문이 오토바이에서 발견이 되었으나 지문이 중요한게 아니다라는 이유로 증거품에서 배제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증거품을 엉망으로 다룬것이 이 사건이 미제사건으로 남는데 큰 역활을 하지 않았나 싶다. 


● 은행에 보내진 협박장 우표에서 범인의 침이 발견되었으며 B형으로 밝혀졌다.


● 수사에서 용의자 리스트에 실린 인원은 무려 11만명, 총 수사인원 17만명이 동원되었으나 공소시효가 지나 미제사건으로 남는다.


● 사건이 일어난곳에서 5KM떨어진 곳에서 수송차량이 발견되었는데 경찰은 어떻게 무거운 큰 액수의 종이뭉치를 이동했는지도 밝혀내지 못했고 돈을 옮기는것도, 도주하는것도 목격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 지금까지도 사라진 도난당한 돈이 한장도 유통되지 않았다.(후에 일부 지폐의 일련번호가 공개됨)


● 강탈당한 돈은 보험에 가입이되어있어 후에 전부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 범인이 돈을 탈취하고 도주하는데 걸린 시간이 단 3분, 그리고 돈이 담겨져있는 가방의 무게가 150Kg이라고한다.


● 용의자로 지목되어 언론으로 부터 피해를 받아 자살한 사람 1명과 두명의 경찰관이 과로로 순직했다.


● 이 사건 이후 현금 수송의 위험이 있는 고액은 계좌로 입금을 하거나 훈련을 받은 전문 경비원이 수송차량에 동승하는

현금수송 경비가 증가했다.



3억엔 미제사건


도난당한 현금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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